가톨릭진행에 관한 교서 관련 부록
가톨릭진행에 관한 교서와 함께 확인해야 하는 부록 자료로, 결의사항의 배경과 관련 기록을 함께 살필 수 있도록 정리한 항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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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주교주교회의(이하 ‘주교회의’)는 한국 교회 전체의 선익을 위해서 사목 임무를 조정하여 수행하도록 교황청이 법인으로 설립한 상설기관으로 한국 주교들의 회합이다(한국 주교회의 정관 제1조; 교회법 제447조, 제449조 참조).
주교회의는 공통 선익에 관련된 모든 것들에 관하여, 특히 국가와 시대 상황에 가장 적합한 사도직 형태와 방법을 참작하여, 의견과 정보를 교환하고 연구·협의하며 교령을 제정하고 이를 집행한다. 필요할 때마다 사도좌에 문제의 공동 해결을 청원하고, 사도좌에서 받은 교령과 해결책을 실시하며, 그 밖에 보편 교회와 한국 교회의 공동선을 위하여 해야 할 것들이나 사도좌에서 요청한 것들을 다룬다(한국 주교회의 정관 제2조 참조).
한국 천주교 주교들의 첫 회합은 1857년 3월 서울에서 열렸다. 3월 25일 조선대목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의 주례로 다블뤼(Daveluy, 安敦伊) 신부가 주교로 서품되었는데, 서품식 다음 날인 3월 26일부터 28일까지 조선대목구 최초의 시노드가 개최되었다. 시노드에서 논의된 사항 가운데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대한 지침인 「장주교윤시제우서」가 1857년에 반포되었고, 선교사 행동 규칙이 1858년에 사목 서한(라틴어)으로 작성되어 선교사들에게 발송되었다.
1868년 만주의 차쿠에서 조선대목구 성직자 회의가 열렸으나, 병인박해 때 주교들이 순교하여 주교 없는 회의로 진행되었다. 1884년 9월에도 서울에서 시노드가 개최되었으나, 당시 주교가 한 명뿐이었기에 주교들의 회합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후에도 한국 교회는 한 명의 주교가 조선대목구 전체를 관할하는 구조가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교황 비오 10세가 1911년 4월 8일 조선대목구를 서울대목구로 명칭을 변경하고 대구대목구를 신설함과 동시에 대구대목구장으로 드망즈(Demange, 安世華) 신부를 주교로 임명함으로써 주교회의를 개최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다.
한국 교회의 전(全) 교구 주교들이 참석한 회의는 1931년 9월 13일부터 26일까지 서울에서 열린 ‘조선 지역 공의회’였다. 조선대목구 설정 100주년을 기념하여 열린 이 공의회에는 주일(駐日) 교황사절을 비롯하여 서울대목구장과 부주교, 대구대목구장, 원산대목구장, 평양지목구장, 연길지목구장 등이 참석하였다. 공의회의 핵심 안건은 한국 교회의 공동 지도서를 만드는 일이었다. 주교회의의 논의를 거쳐 1932년에 대구대목구장 드망즈 주교의 책임 아래 『조선 선교지 공동 지도서』(전 조선 성교회 법규)가 완성되었다.
주교들의 회합은 이후에도 계속 개최되었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를 계기로 주교회의는 교회의 상설기관이 되었다. 1966년 11월 30일부터 12월 2일까지 개최된 주교회의에서 주교회의 규약을 확정하였으며, 전국 차원의 문서 선교 등을 위하여 중앙출판사의 기능을 하도록 설립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 사무국의 임무를 맡겼다. 1967년 12월 4일 사도좌로부터 주교회의 규약을 승인받았으며, 임시 의장단이 정식으로 취임하였다.
주교회의는 보편 교회의 법전 개정과 교황의 지침에 따라 정관을 지속적으로 개정하였다. 1983년에 새 교회법전 공포에 따라 정관을 전면 개정하였으며, 1985년 1월 31일 사도좌의 정식 승인을 받았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자의 교서 「주님의 사도들」(Apostolos Suos)에 맞추어 개정된 정관이 2002년 2월 14일 사도좌의 승인을 받았다. 이후 주교회의 2010년 춘계 정기총회에서 개정한 정관이 2011년 4월 8일 사도좌의 승인을, 주교회의 2021년 추계 정기총회에서 개정한 정관이 2023년 11월 28일 사도좌의 승인을 받았다.
주교회의에서 주교들은 교회의 주요 안건을 협의하고 결정하며, 회의록 작성 후 그 결정 사항을 ‘교서’ 등으로 공포한다. 그러나 1962년 이전의 관련 사료는 박해와 전쟁 등을 거치며 상당 부분 소실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사무처와 같은 전담 보존 기구의 부재로 인해 원본을 찾기 어려운 실정이다. 이에 따라 이 시기 주교회의의 기록은 보존된 원본 문서보다는 『경향잡지』 등에 게재된 기록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1906년 교회가 창간한 「경향신문」의 부록 ‘보감’으로 출발한 『경향잡지』는 1911년 제호 변경과 함께 독립 잡지로 개편되었고, 1933년부터는 교회의 공식 기관지로 자리매김하였다. 주교회의를 전담하는 사무처가 없던 시절, 『경향잡지』는 주교회의 개최 소식과 주교들의 교서를 게재함으로써 교회의 주요 기록을 보존하는 역할을 하였다.
주교회의 의결 사항과 교서는 사목, 신앙생활, 교회 단체, 교회 간행물 등 교회 운영 전반을 다루었다. 예를 들어, 1933년 3월 주교들은 교회 당국의 위임과 지도하에서 행하는 평신도의 조직적인 활동인 가톨릭진행(가톨릭운동)에 관한 교서를 발표하였다. 1940년 6월에는 1939년 교황청이 조상 제사를 허용한 훈령의 취지를 신자들에게 설명하는 교서를 발표하였다. 1950년 2월에는 기해·병오박해 순교자 시복 25주년을 맞아 순교지인 새남터에 순교 기념탑의 건립을 공포하는 교서를 발표하였으며, 1955년 10월에는 소신학교 시설 건축을 위해 신자들의 원조를 호소하는 교서를 발표하였다.
주교회의는 교서와 성명서를 통해 당대의 중요한 사회 문제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기도 하였다. 1949년 4월 주교들은 헝가리 공산당의 민첸티 추기경(József Mindszenty) 탄압에 대한 항의서를 발표하였다. 1950년 2월에는 공산주의의 교회 비판을 반박하는 한편, 노동과 자본 문제, 농촌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며, 신자들에게 ‘사회질서 재건의 사도’가 될 것을 당부하는 성명서(제목: 사회질서 재건에 대하여 교도와 동포에게 고함)를 발표하였다. 1961년 9월 교서에서는 기구나 약물을 이용한 인위적인 산아(産兒) 제한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고, 인구 문제 해결 방안을 제시하였다.
한편, 주교들은 정기적인 연례 회의 외에도 교황의 칙령, 새 교회법전 반포, 성년(聖年)이나 주요 축일(祝日) 및 특별 행사가 있으면 공동 기도, 전대사(全大赦), 소재(小齋) 관면(寬免) 등에 관한 문서를 발표하였다. 이러한 자료들은 주교회의 체제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을지라도, 한국 교회의 공동 사목을 위한 주교들의 활동을 기록하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이처럼 주교회의는 사목과 신앙생활 등 교회의 전반적인 주요 현안을 논의하고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 따라서 주교회의 관련 사료는 한국 천주교회 연구의 필수적인 자료라 할 수 있다. 특히 당대의 주요 사회 문제에 대한 논의 기록은 한국 교회가 시대적 상황을 어떻게 인식하고 대응했는지를 입증하는 중요한 사료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